<제목 : 666의 뜻 / 첫째 짐승은 교황이고 둘째 짐승은 미국이다 / 가라지 비유 해설 / 열 처녀 비유 해설 / 진사성인은 요한계시록의 십사만 사천이다 / 복음서의 외식(外飾) 해설 / 눅12:1~12 해설 / 나의 성부성자성신 삼위일체론 / 계14장 해설 / 1600스타디온의 뜻 / 14,4000의 뜻 / 처음 익은 열매의 뜻>
요한계시록
13: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 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13:2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13:3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13:4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13:5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13: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13:7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13:9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13:10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13: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 어린 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을 하더라
13:12 그가 먼저 나온 짐승의 모든 권세를 그 앞에서 행하고 땅과 땅에 사는 자들을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
13: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13:14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13:15 그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
13:16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13:17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13: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지금 다니엘서 12장 1절의 대환란까지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다. 내 예상으로는 2, 3년. 그래서 미국이 하는 저 행동들은 이미 다 이루어졌다고 봐야 한다.
13절은 다음의 유튜브 채널에 미국에 일어난 기적들에 관한 내용이 있을 것이니 잘 찾아보아라. 내가 전에 본 적이 있는데 영상이 1200개나 되어 못 찾겠다.
현재의 미국도 진리를 따르는 것은 아니므로 (비유적으로) 성도를 핍박한다고 볼 수 있다. 교황을 피해 달아난 세력이 세운 국가이지만 결국 교황하고 똑같은 것이다. 새끼양(성도)을 표방하지만 용(비도)인 미국. 두 번째 짐승.
그렇다. 재물이나 건강도 정치적사상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우상은 꼭 종교적인 것 불상이나 구교의 마리아상이나 예수상이나 “형상을 안 세우는 신교”를 말함이 아니다. 자식을 애지중지하는 것도 부모에게 효도를 하는 것도 비진리 안에서는 하나의 우상인 것이다.
짐승의 우상으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는 것은 현대의 인류가 저 우상들을 섬기고 그들을 따른다는 뜻인 듯하다.
강목사의 오류는, 적그리스도가 과거나 미래의 것이 아니고 교황인 것처럼 저 짐승의 우상도 현재의 것이라는 점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과거 중세의 그 교황의 것과 같은 정치와 종교의 연합적인 성격의 무슨 권세가 미래에 나타나리라고 믿어선 안 된다. 그것이 일어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기도 하거니와 그것이 일어나려면 시간이 많이 드는데 지금 시간이 여유가 없다. 내년에 세계3차대전시작이고 곧이어 대환란이 온다. 지금 교황의 모습을 보면 매우 서민적이고 탈권위주의적이다. 사람들이 머리를 숙여 교황의 손에 키스를 하려고 하면 굳이 손을 빼버리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그런 교황이 미국과 결탁하여 중세시대의 것과 비슷한 무언가를 하고 다 죽이게 하고 이런 걸 할까? 그보다는 요즘의 황금만능주의나 연예인 등의 우상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한다. 김일성 우상화도? 아니면, 미국은 개신교를 상징하는데 그 개신교가 교황과 마찬가지로 짐승이다라는 뜻이겠다. 예수의 산상수훈 속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는 구교와 신교 모두이다. 양가죽을 쓴 이리 말이다. 그리고 웃긴 것은 신교는 우상을 싫어하는데 사실은 그들도 교황처럼 우상숭배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그 유대교 외의 이방종교의 우상숭배인 것이다. 그리고 다 죽이게 하라의 그 죽임의 대상은 성도인 것이다. 성도는 진리에서의 善그리스도와 세상에서의 세상(우주만물)을 뜻한다. 이는 실제 사람의 마음 속의 죽임이지 절대로 실제 물리적인 겉의 살해가 아니다.
마태복음
13:24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13:25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13:26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13:27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13:28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13:29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13:30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알곡과 가라지 비유는 무슨 뜻일까? 두 가지로 나누어 해석해 보자.
- 가라지를 태극으로 알곡을 무극으로 보자면, 저 비유는, 천국은 태극과 무극이 합일하여서 태극하여도 무극한 것이다란 뜻이다.
- 가라지를 지옥으로 알곡을 천국으로 보자면, 저 비유는, 지옥과 천국이 심판되어서(지옥과 천국이 분리되어서, 지옥은 지옥이고 천국은 천국이어서, 지옥 위에 지옥을 짓고 천국 위에 천국을 짓어서, 성도의 권세와 비도의 권세를 반반(42달, 1260일)씩 하지 않아서, 사람 심중에 천국과 지옥 둘 다 있어서 그 둘 간에 구별이 되어서 즉 가라지가 뽑히지 않아서 가라지와 싹이 공히 자라서) 지옥이 버려지고 천국이 남음을 뜻한다.
내가 다른 글에서 쓴 바 있지만, 열 처녀 비유에서 '다들 졸며 잘새'에는 의미가 있다. 진리는 졸지만 깬다. 비진리는 졸지만 그대로 잔다. 이 차이가 있다. 둘 다 똑같은 존다는 조건하에서 천당과 지옥 사이에는 전자는 깸이 가미되고 후자는 깸이 가미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 졸지만 깬다는 것은 등(세상)에 기름(그리스도: 그리스는 기름이라는 뜻이다.)이 없지만 등에 기름이 있다는 것이고, 졸지만 존다는 것은 등에 기름이 없지만 등에 기름이 없다는 것이다. 전자는 온다는 기약에 예비(지금 당장 이룸)한 것이고 후자는 온다는 기약에 그대로 기약인 상태이다. 전자는 언제 올지 모르지만 언제 올지 안다는 것이고(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니 불침번을 섬이고) 후자는 언제 올지 모르지만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이다(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니 잠).
그런데, 과연 듣어보니 강목사의 말대로 두번째 짐승의 행위가 실현되었다. 참 가관이다. 그렇다. 신앙은 내적인 것이어야 하며 도덕캠페인이어서는 안 된다. 미국이 잘못 가고 있구나. 이 어찌 기독교 즉 구교와 신교의 행위가 아닐 수 있다는 말인가? 종교는 다 외적이다. 이러한 잘못 감을 태생적으로 본래부터 내재하고 있다. 이슬람교도. 미국은 마치 리틀 교황 같다. 과연 둘째 짐승이다. 구교와 마찬가지로 신교도 짐승이다. 이리이다. 양이 아니다. 땅(북아메리카)으로 광야로 도망친 여자(예수)는 이리이란 말인가? 성도의 탈을 썼으나 속은 이리(적그리스도)였구나. 예수는 적그리스도이다. 예수(교황, 미국)를 멀리하라. 그들을 삼가라.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더라
14:2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 소리와도 같고 큰 우렛소리와도 같은데 내가 들은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이 그 거문고를 타는 것 같더라
14:3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14:4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14:5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14:6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14:7 그가 큰 음성으로 이르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14: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14:9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이르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14:10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14: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4: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14: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14:17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4:18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14: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14:20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십사만 사천은 예수의 동료 그리스도들이다.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은. 그리고, 예수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한 것이 절대 아니다. 자기 힘으로 한다. 예수가 그렇게 했듯이. 우리는 다 어린양이 되어야 한다. 다 어린양이 되어 어린양집단인 십사만 사천에 들면 좋지만 현 지구상황이 그렇지 못하다. 안 드는 사람이 더 많다.
시온산은 신이라고 보면 된다. “예수 및 십사만 사천” 즉 어린 양들은 독재자인 그이와 각각 하나(독생자. 독재자의 외아들.)이다.
요한계시록
7:1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7:2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받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7:3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
7:4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전쟁과 재난은 아마 세계3차대전과 그 이후의 대환란인데 그 전에 인침을 행한다고 되어 있다. 이는 내 추리로는 진사(2024년, 2025년)성인이다. 나도 그 중 하나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내가 전 글에 썼겠지만, 이 자들은 십사만 사천이 아니고 성도(세상만물)이다. 어린양들의 보살핌을 받는. 이것은 내적인 것이다. 이 씻어줌은 마음 속에 존재한다. 마음 안에 세상이 다 들어간다. 이 마음은 실제로 세상과 연관된다. 영혼이 신과 연결되고 이 신은 세상의 주인이다.
12지파는 신이 선택한 민족 즉 우주를 뜻하고 그 중에서 지구인류도를 뜻한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골고루 적합한 사람들을 뽑는다. 사람은 우주(양떼)의 일원인 동시에 어린양(목자)들이다. 그래서 12지파(양떼)에서 십사만 사천의 어린양(목자)들이 나오는 것이다.
처음 익은 열매의 뜻을 나는 모른다. 또, 십사만 사천이 성도인지 그리스도인지 모른다. 이런 고민은 기독교인들은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주님은 오직 한 분이므로 십사만 사천은 당연히 성도가 되니까.
영원한 복음이란 것은 영원한 진리를 뜻한다. 진리는 과거 현재 미래에 영원히 동일하다. 그리고 동양이든 서양의 나라이든 북한에서든 어느 곳에서나 통하고 진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하나이다.
죄 용서가 죄인 구원이다. 말만 다를 뿐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에 대해서 논하겠다.
위 글은 덕은 이명(귀울림병)처럼 하고 허물은 비식(코로 쉬는 숨. 숨쉴 때 코에서 소리 나는 병?)처럼 하라는 글인데, 이는 나의 덕을 밝히는 것을 싫어하고 감추는 것을 좋아하고 나의 허물을 밝히는 것을 좋아하고 감추는 것을 싫어하라는 뜻이다. 실제의 상황을 다 전개해 보면, 내가 나의 덕 밝힘을 싫어하고 좋아하고 감추는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나의 허물 밝히는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감추는 것을 싫어하고 좋아한다. 이 싫어함과 좋아함이 하나가 된 진리에서는 싫어하여도 좋아하고, 이 싫어함과 좋아함이 둘이 된 비진리에서는 좋아하여도 싫어한다. 그래서 진리에서는 어찌 되겠는가? 이는 덕 밝힘이다 ~ 나의 덕을 밝히는 것이 바람직할 때에는 밝히는 것이 좋다 등등의 많은 명제가 시인(좋아함, 믿음, 구원, 용서, 사랑, 진실(참그리스도의 입에는 거짓말(부인)이 없다))된다. 비진리에서는 명제들이 부인(싫어함)됨으로써 그 반대의 부정적인 결과가 나온다. 나의 비리를 감추지 않는 것이 좋은 상황에서도 극구 감추려 하는? 그러나 대개는 나의 명예가 실추되지 않는 것이 긍정적일 것이다. 이 덕무이명 과징비식을 아래의 2, 3절과 연결할 수 있을까? 1절에서의 외식은 뭘까? 예를 들면, 내 비리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음을 깨끗케 함을 뜻한다. 내 비리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음은 겉 깨끗이다. 이 겉 깨끗이 속 깨끗함과 이 겉 깨끗이 속 더럽음을 합하여서 이 겉 깨끗이 속 더러워도 속 깨끗함은 외식이 아니다. 겉도 깨끗하고 속도 깨끗한 것이다. 그러나, 이 겉 깨끗이 속 깨끗함과 이 겉 깨끗이 속 더럽음을 안 합하여서 이 겉 깨끗이 속 깨끗해도 속 더러움은 외식이다. 겉은 깨끗한데 속은 더러운 것이다. 외식이란 것은, 속이 더러운데 겉의 깨끗한 것으로 “속의 더러움을 위장한 것 즉 속을 깨끗케 하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각자 자기 허물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깨끗한) 것이 외식이다. 아래 2, 3절은 내 비리(나 자랑)이(가) 숨겨지는 겉 깨끗함과 내 비리가 滿天下에 공개되는 겉 더럽음이 속으로는 똑같음을 나타낸다. 즉 겉 깨끗함과 겉 더럽음이 다 속 더럽고(싫고) 속 깨끗하다(좋다)는 것이다. 조합하면 총 네 가지 경우의 수이다. 내 생각으로는, 겉 더럽음(비리 공개, 자랑 비공개) 겉 깨끗함(비리 비공개, 자랑 공개)과 속 비리(소곤소곤, 감추임, 더럽음, 수치, 잊힘) 속 자랑(지붕, 드러남, 깨끗함, 영광, 잊히지 않음)을 겸하여 표현한 것이 2, 3절이다. 외식하는 경우에는, 겉 깨끗함(과 겉 더럽음)이 속 깨끗해도 속 더럽다. 외식치 않는 경우에는, 겉 깨끗함(과 겉 더럽음)이 속 더럽어도 속 깨끗하다. 4절을 보자. 하나님을 (속) 경외한다의 경외는 한 편으로는 (속) 사랑하나 한 편으로는 (속)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나치가 유대인 죽이는 것처럼 사람이 나를 죽이는 것은 겉 더럽고 겉 두렵고 겉 無視스럽다. 국가에서 나에게 보조금을 주는 것은 겉 깨끗하고 겉 사랑스럽고 겉 敬愛스럽다. 그런데 4절은, 나치를 두려워하지 말고 내(이 나는 신과 연결되어 있다)가 저 두 사건(세상 즉 물질의 일부이다)을 사랑해도 미워하는 것 즐거워해도 두려워하는 것 즉 나와 물질과 하나님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라고 하고 있다. 즉 겉 더러움보다 속 더러움을 경계하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겉 깨끗함(국가가 보조금을 줘서 나를 돕음)을 속 사랑하여도 속 미워하는 것이 외식이다. 외식치 않음은, 우리가 겉 깨끗함(국가가 보조금을 줘서 나를 돕음)을 속 미워하여도 속 사랑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어떻게 될까? 겉 더러움(사람이 나를 죽임)을 속 미워하여도 속 사랑하는 것과, 겉 더러움(사람이 나를 죽임)을 속 즐거워하여도 속 두려워함이 있다. 우리가 삼가야 할 것은 연보라색 글이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연회색 글이다. 전자는 三者(신과, 신의 아들과, 세상: 나는 성부 성자 성신에서, 성부는 세상을 안 돌보는 신 하늘에 있는 신 악신이고, 성신은 세상을 돌보는 신 保惠師聖靈· 땅에 있는 선신이고, 성자는 이 신(성부와 성신은 한 신의 동시적 두 속성에 불과하다)과 연결된 사람의 영혼이라고 생각한다.)의 천당이고 후자는 三者의 지옥이다. 4절, 5절은, 차라리 세 번째 색 글을 하지 네번째 글을 하지는 말라는 뜻이다. 6절에서 참새는 비참한 운명이다. 팔려서 분명 잡아먹힐 것이다. 7절 후반절처럼 사람은 그런 운명보다는 낫으니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 운명이 참새운명보다는 겉 덜 두렵다. 6절 후반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걸 돌본다 그걸(참새가 팔려서 잡혀먹음) 명령하신다고 되어 있다. 이는 참새입장 겉 더러움 속 깨끗함(참새는 그리스도가 아니므로 그리스도로서의 더러움은 없다)이다. 7절에서 유대인이 나치에게 잡혀서 죽는다고 해보자. 그러나 이것마저 신은 다 잊지 않으시고 있다. 그는 침묵하시지 않으신 것이다. 그것은 겉 더럽 속 깨끗이다. 비록 겉으론 무섭게 죽지만 사람 마음은 속 두려움 없는 천국인 것이다. 이는 세번째 색 글에 해당한다. 7절은 아마 겉 더럽 속 깨끗과 겉 깨끗 속 깨긋이 되면(이 둘은 항상 같이 다닌다. 둘 다 천당이다.) 겉 깨끗 속 깨끗쪽으로 힘이 쏠리므로, 우리가 참새 운명이 참새 운명보다 겉 덜 두렵듯이, 우리가 나치에게 죽는 것 겉 두렵음보다는 국가에서 보조금 받는 것 겉 사랑스럽음으로 힘이 쏠린다는 뜻인 듯하다. 참새가 한 앗사리온에 팔려 죽는다는 겉 더럽음이 속 깨끗하고 인간이 한 앗사리온에 팔려 죽지는 않는다는 겉 깨끗함이 속 깨끗하면 즉 세밀한 머리칼이나 미미한 참새마저 잊지 않으시듯이 하나님이 잊지 않으시면 후자로 힘이 쏠린다. 겉 깨끗 속 깨끗 쪽으로. 속 지옥 내적 지옥 심적 지옥에서는 반대로 되어 겉 더럽 (속 더럽) 쪽으로 쏠린다. 8절은 세상(위의 참새 머리칼 인간 나치 국가의 일 포함)이 성자를 시인하면 성자도 성부와 함께 세상을 시인(잊지 않는다 머리칼을 센다 액수를 센다 나치가 하는 짓을 본다)한다는 것이고, 9절은 세상이 성자 즉 나를 부인하면 성자도 성부와 함께 세상을 부인(잊는다 머리칼을 못 센다 등)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천국이고 후자는 지옥이다. 10절은, 예수더러 김정은이 선생님 좋아요 눌렀어요 기쁨조 보내드릴 테니까 적당히 데리고 놀으세요 하는 예수입장 겉 깨끗과 예수더러 김정은이 이 개새끼야 니 글 보고 내가 암살조 보냈다 하는 예수입장 겉 두렵 더럽이 다 속 더럽과 속 깨끗이 있다고 하면 총 네 가지 경우가 생긴다. 10절 前半部는 세번째 색 글에 해당하고, 10절 後半部는 둘째 색 글과 셋째 색 글에 해당한다. (속) 사함은 속 깨끗이다. (속) 안 사함은 속 더럽이다. 예수 말대로 하자면, 예수가 욕 먹는 것을 두려워하면 안 되고, 예수가 욕 먹고 기분까지 더러운 걸 예수는 두려워해야 한다. 11절 12절의 사람과 너희는 세상이다. 이 절의 話者가 우리들 즉 주님들(누누히 쓰지만 세상의 진짜 주님은 주인은 신이다)이다. 우리가 그들이 말하는 것에 명령하는 것은 그들이 말할 때에 잊지 않는 것이고 그 말 하나하나를 아는(세는?) 것이다. 우리가 명령한 대로 그들은 말한다. 마치 작가의 의도대로 배우들이 말하는 것과 같다.
여러분은 방 안에 앉아서 텔레비젼에 출연하라. 참새에 출연하라. 한국에 2000년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나치의 학살에 참여하라. 출연하라. 출세하라.(彌勒出世) 아나운서의 말에 지시를 하라. 엄마의 잔소리에 출연하라. 잊지 말라. 세어라. 그러나 11, 12절은 비유이다.(실제의미로 써도 되겠는데) 실제 아나운스멘트를 뜻함이 아니다. 저것은 박해의 상황을 비유한다. 이는 신이 물질을 부인하는 상황이고 말(명령과 뜻을 비유함)을 안 넣어주는 곤란한 상황이고 잊어버리고 안 세는 상황이다. 이것은 성령이 물질에게 속 쌍욕을 하는 상황이다. 이때에 신이 물질에게 말을 넣어주면 물질이 물질이 옥에 갈 일에서 풀린다. 이는 신이 물질을 시인하는 상황이다. 신이 물질에게 말씀을 주고 물질이 신에게 행위를 주면 신이 물질에게 말을 하고 물질이 신에게 말하거나 신이 물질에게 찬양을 하고 물질이 신에게 찬양을 하는(신이 물질에게 저를 옥에서 풀으라 하고 물질이 신에게 저를 옥에 풀으라 하는) 것이고, 신이 물질에게 말씀을 안 주고 물질이 신에게 행위를 안 주면 신이 물질에게 말을 안 하고 물질이 신에게 말 안 하거나 신이 물질에게 훼방을 하고 물질이 신에게 훼방을 하는(신이 물질에게 저를 옥에 가두라 하고 물질이 신에게 저를 옥에 가두라 하는) 것이다.
누가복음
12: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12: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12: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12: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12: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12: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12: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12: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12: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2:11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12: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이는 4복음서에서 영광이란 단어로 검색하면 자료가 우수수 쏟아진다. 너무나 명백하게 풀을 수 있는 문제이다. (나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는 것은 나(빛의 아들, 쇠파리, 원님 덕에 나발 부는 나발꾼, 공자 업고 송사하는 자)인 아들도 영광을 받고 신(빛, 천리마, 원님, 공자)인 아버지도 영광을 받는다는 뜻이다. ― 영화배우들 상 받을 때 이 영광을 감독님과 스텦들에게 돌립니다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간혹 하나님께 이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하는 배우들도 있는데 이 현상은 위 계시록 구절과 아래 산상수훈 빛과 소금 비유의 현상과 다르다. 그들이 5:16을 실천하고자 이런 행위를 한다면 이는 잘못된 해석에 의한 행동이다. 그래서 5:16에 의한 혜택과 효력만큼은 받지 못한다. ― 이는 물질(세상, 千里)이 신에게 찬양(시인? 시인당함?)을 하는 상황이다. 내(빛과 소금)가 세상(실내, 음식)을 잊지 않아 세상이 내게서 영광을 받고 그 보답으로 세상(음식, 실내)도 나(소금, 빛)를 잊지 않아 내가 영광을 그로부터 받는다.
마태복음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는 소금이다 과실은 음식이다. 아버지는 진짜 소금이다. 소금(神과 天子)이 음식을 받으면 이는 소금의 영광이다. 과실은 음식을 받음이고 씨는 소금이 (짠) 맛을 얻음(소금이 음식을 못 받음)이다. 씨라는 수치가 없으면 열매라는 영광은 없다. 사실, 위의 띠를 친 '아무 쓸데없어 버려짐'은 영광이어도 수치이다의 수치이고, 소금이 맛을 얻으면 쓸데있어 안 버려진다의 소금이 맛을 얻음은 수치이어도 영광이다의 수치이다. 그래서 같은 태극이라도 질이 판이하게 다르다. 하나는 진리의, 다른 하나는 비진리의.
※ 내가 착각했다. 다음 글에서 영광으로 검색하여 새 내용을 읽으라 ☞
위 5:16을 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이고 사람들은 세상이다. 인자 즉 그리스도가 사람들로 하여금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라고 했으니 영광을 돌리는 주체는 세상이다. 나는 우리 인자들이 주체인 걸로 착각했으나 위 포스트에서 시정했다.
목사님 말대로 예수가 재림하기 전에 심판(대환란)이 있다. 여기서 살아남아야 예수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십사만 사천을 성도라고 가정하자. 십사만 사천은 무한한 세상이다. 12×12×1000=14,4000에서 1000은 많다는 뜻이며 이는 무한을 뜻한다. 12지파와 12제자는 구약 유대교의 진리와 신약 기독교의 진리를 뜻하고 이스라엘 전체와 제자 전원을 뜻하는데 이는 다 세상을 비유한 것이다. 우주신은 왕, 스승격이고 우주는 이스라엘백성, 제자격이다. 그리고, 처음 익은 열매는 제사용 최상급 열매이니 그냥 열매로 간주해도 된다. 우리가 쓰는 열매라는 단어의 의미가 제물용 열매의 뜻과 통하니까. 계14장의 처음 익은 열매는 성도이다. 그리스도(소금)의 열매 소유물 음식물 보물은 성도(음식)이다. 성도(음식)의 열매 소유물 음식물 화물은 그리스도(소금)이다.
바벨론(음녀, 여황)은 지난 역사의 그 바벨론과 교황(기독교회)을 뜻한다. 다 비진리(거짓신과 거짓선지자와 거짓성도)를 뜻한다. 여자(예수, 유대교, 개신교)는 참된 것 진리이지만 이 여자가 바벨론(기독교회, 교황, 천주교)과 혼합됨으로써 전자가 깨뜨려졌다. 바벨론이 음행하면 여그리스도가 음행하면 그의 남편인 세상을 버린다. 이는 하나님의 음행이고 하나님이 세상을 버림이고 맞바람 핀 세상에 대한 신의 진노인 것이다. 포도주는 피(진노)이지만 좋은 음료인데 진리에서는 상호 피여도 포도주이지만 즉 포도주를 못 마셔도 포도주를 마심 즉 진노의 포도주여도 화목의 포도주이지만, 비진리에서는 상호 포도주여도 피이다 즉 포도주를 마셔도 포도주를 못 마신다 즉 화목의 포도주여도 진노의 포도주이다. 비진리의 진노에는 조금도 화평이 없다. 진리의 쾌락에는 조금도 고난이 없다. 이것이 심판(확실한 구분, “섞은 것이 조금도 없음”)이다.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것은 비성도의 권세가 무너졌음이고 이는 가까운 장래의 일이다. 인류의 과거 역사는 음란한 여황 바벨론이 굳건했고 열국 즉 가정에 건실한 남편 종 성도는 깨뜨려졌다.
짐승(음녀)의 표를 받는 바람쟁이 남편 종 성도는 지옥에 간다. 비도가 된다. 비도가 됨은 성도의 권세를 깨뜨림이다.
구약과 신약의 구더기나 연기나 불로 비유된 지옥과 그 반대의 천당은 각각 쉬지 않고 끊임없이 世世토록 영원한 것이 맞다. 천당은 밤낮 쉼(쾌락)이 있고, 지옥은 밤낮 쉼(쾌락)이 없다.
요한계시록
14:11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14:12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11절의 자는 짐승세상이고 지옥에서 고난 받는다. 12절의 성도는 선한세상이고 나는 이것을 부정적으로 보는데 그것은 선한세상이 짐승세상과 섞이므로 후자가 승리하기 때문이다(이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예언된 인류의 과거역사이다). 결국 11절로 귀결된다. 인류가 저렇게 살았다. 짐승的지도자가 되어 세상을 죽여왔던 것이다. 짐승이 되어 세상(匪徒)의 경배(실은 비방이다. 지옥이니까 반대로 된 것. 즉 악마를 경배하는 것이니 신을 비방하는 것과 같다.)를 받아왔다. 13절의 주 안에서 죽는 자들(아래 밑줄: 나로 인해 쉬는 자(세상, 성도)는 수고해도 쉬겠고 무릇 쉬어서 나로 인해 쉬는 자는 영원히 수고를 그치리니: 목사님이 착각하고 있는 것은, 위 13절의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의 죽음은 절대 순교가 아닌데 순교라 생각함이다. 오직 삶이며 섞은 것이 없는 철저하고 세세토록의 삶이다. 영원히(절대) 죽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이 바로 그 뜻이다. 죽어도 산다는 것은 죽음이 전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살아도 죽는 것은 삶이 전혀 없다. 영원히 살지 아니하리니.)은 성도이며 이는 긍정적인 것으로서 선한세상이 짐승세상과 섞이지 아니하므로(지금 이후. 말세 이후. 가까운 미래.) 전자가 승리한다. 쾌락이 세세토록 유지된다. 과거(바벨론 ~ 현대 교황 미국)에는 우리가 세상을 살려도 죽였으나(우리가 세상을 죽여도 살리는 것과 우리가 세상을 살려도 죽이는 것이 섞여서 전자(성도의 권세)가 무너졌다) 이후로는 우리가 세상을 죽여도 살린다.(우리가 세상을 죽여도 살리는 것과 우리가 세상을 살려도 죽이는 것이 아니 섞여서 후자(바벨론)가 무너진다)
요한복음
11: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11:24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11: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흰 두루마기(피 옷의 반대. 비순교.)를 받으며 동무들(세상)도 순교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 함을 듣는 자(세상)가 바로 과거의 우리에 의해 순교한 세상이며, 그들이 기다리고 있는 때는 장차 올, 우리에 의해 사는 세상의 때이다. 우리(음녀)가 이들을 죽여 왔다. 미래에는 죽이지 않게 될 것이다. 강 목사는 위의 착각에 방금 전 대목의 착각을 더하여 순교의 때가 장차 비유가 아닌 실제로 있을 것이다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잘못된 해석이며 그런 순교사건은 없을 것이니 기독교인들은 안심하라. 다만 기독교인들은 타종교인들과 비종교인들과 마찬가지로 대환란의 때를 넘기기 힘드니 그리 알아라. 그리고, 만약 순교한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여 죽음과 삶이 각각 순차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면 이는 오직 삶인 진리 안에 죽음과 삶이 섞인 것이니 이는 심판이 아니고 혼동이다. 이 잘못된 해석은 목사의 무식의 소치이다. 더구나 저 말씀은 인간의 실제 심적작용의 비유일 뿐이며 실제 역사의 예언이 아니다. 강 목사가 666이 미래에 올 무슨 존재가 아니라는 건 맞게 말했지만, 이 대목에서는 그런 천주교의 666에 대한 거짓 이야기 비슷한 얘기를 자기가 하고 있다. 미래의 순교 사건 따위는 없다. 세계정세를 보라. 순교사태가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 지금 사이가 안 좋은 것은 공산주의자와 자본주의자 그리고 이슬람과 유대인들이다.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인을 많이 죽였지만 다 과거의 일이다. 만일 신앙포기 대가로 살려준다고 하면 당장 신앙을 포기해야 한다. 기독교는 엉터리교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을 위해 죽는다는 것은 개죽음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이 기독교를 탄압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거니와 기독교를 고수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요한계시록
4:14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인자와 같은 이가 앉으셨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4:15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당신의 낫을 휘둘러 거두소서 땅의 곡식이 다 익어 거둘 때가 이르렀음이니이다
14:16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땅의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14:17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역시 예리한 낫을 가졌더라
14:18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예리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이르되 네 예리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14:19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14:20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 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낫과 피와 진노와 불과 '틀에서 밟음'은 사망이고, 추수와 포도주와 화해와 물과 포도주는 생명이다. 사망은 하늘(임금, 성전, 제단)과 땅(성)의 離反(성 밖, 성전 밖. 포도가 안 익음. 생장기간.)이고 상호 피흘림이고, 생명은 하늘과 땅의 화합(성 안, 성전 안. 포도가 익음.)이고 상호 포도주 마심이다. 피(포도주 틀에서 피가 남)가 있어야 포도주를 마신다. 상호, 포도주를 못 마셔야 포도주를 마신다. 즉 천지가 분리되어야 천지가 만날 수 있다. 천에 지가 없어서 천이 피를 흘려야 지를 얻어서 지를 마셔서 회생한다. 또, 지는 천이 없어서 피가 철철 흐르는 상태인데 그 피를 마시는 게 곧 천이 지라는 포도주를 마심이다. 왜냐하면 천에게는 그 지가 최고의 음료이기 때문이다. 자지에게는 보지가 최고의 음식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자지에는 보지가 없어야 보지를 영접한다. 자지가 보지가 없이 배가 고파야 보지를 먹을 수 있다. 이상은 지와 보지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4절의 인자가 우리이다. 19절의 하나님이 신이다. 19절, 20절의 성과 포도가 세상이다.
이는 목사님의 착각이다. 14~20은 오직 천국(틀에서 피 나도 포도주)과 진리와 생명을 표현하고 있다. 가라지는 지옥(포도주 나도 틀에서 피)이다. 의인들이 인 침 받는 것(바로 전 14~20절도) 악인들이 666 받는 것도 다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의 삼년반삼년반 틀(프레임)에 들어간다. 결국 이것이 始終一貫하는 것이다.
1600스타디온은 세상전체를 뜻한다. 즉 무한한 세상을 뜻한다. 세상을 다 먹겠다는 것이다. 얼만큼 먹어야 되겠는가? 꼭 필요한 만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무한히 배고픈 만큼 무한히 醉한다. 無窮飽食과 무궁쾌락이 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