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이비설신의는 쉽다. 말 그대로 내 눈이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자기 눈이 없다는 것(눈이 없는 장애인이라면 그의 장애가 없다는 허상 거짓)을 알아야 한다. 아래에 관련 예수 말씀이 있다. 부인 부정 불신은 태극으로서 진리에 필수이다.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 눈이 있는 것을 좋아하지 말라. 눈 있는 자이라 칭함을 받지 말라. 이것이 눈에 대하여 자기를 낮춤이다. 즉 내 육신의 눈이 내(그리스도. 영혼이라기보다는 영혼의 심리작용.) 안에 있는 것이 내가 높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없다고 해야 된다. 낮음과 높음이 연합하여 '낮아도 높음'이 이루어진다. 무안이비설신의해도 유안이비설신의가 된다.
마태복음
23: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3: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23: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23: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23: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23: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23: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23:9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23: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23: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23: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그렇다. 외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해해야 평생 써 먹을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다. 觀其會通과 유불선기 사교 회통의 두 회통은 뜻이 다르다. 전자는 진리 내에서 모든 것이 관통하는 것(원수나 은인이나 다 사랑한다든지 하는 것. 내 臟腑(안이비설신의)를 보는 것(유안이비설신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보는 것 따위.)이며 후자는 모든 종교의 뜻이 각 표현 방식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통일되는 것을 뜻한다.
諸行無常은 세상이 변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리(제행무상/제행유상/제언무상/제언유상)는 불변인 것이다. 제행은 세상이고 무상은 그것이 내 안에 없다 허무하다는 뜻이다. 예를 들자면 무안이비설신의인 것이다. 눈이 있든 눈병이 걸리든 심지어 눈알이 빠져 사라지든 평생 아무 변화가 없든 간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 그것들이 없다(그것들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사야
40: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0: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40: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40: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40: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40: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40: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40: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40:12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40:13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40:14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40: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40:16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40:17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40:18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40:19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40:20 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40:21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40:22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 같이 치셨고
40:23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40:24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
40:25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40: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40: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40: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40: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40: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불교의 無常과 變易은 같은 뜻이 아니다. 무상은 허무인데 어찌 변화와 뜻이 통하겠는가? 변하든 변치 않든 간에 그것들이 허망하고 없다는 것이 무상이며, 변이란 것이 무상과 유상 차원의 거시적인 것이라고 본다 해도 변역은 무상과 유상을 아우르는 것이어야지 무상 단독으로는 변역(무에서 유로 유에서 무로)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정역에 不遷不易之理이란 구절이 있는데 아마 진리는 옮기거나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비진리도 그러하지만. 진리는 무상에서 유상으로 유에서 무로 영원히 변하나, 비진리는 무에서 유로 유에서 무로 영원히 변치 않는다. 이 진리와 비진리는 불변이다.
태극은 무상이고 二, 不一이며 무극은 유상이고 불이, 일이다. 공과 물체가 하나가 된 물아일체의 경지가 무극이다.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말하는 즉시 그르친다는 것에는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노장의 무는 태극이라고 나는 본다. 무위이화에서 무위가 무인데 이는 분명 태극이다. 유가 무극이다. 無問自說(무문자설)은 나의 불교사전에, 묻은 이가 없이 부처님이 스스로 설한 아미타경과 같은 것, 곧 아미타경阿彌陀經을 말함이라고 되어 있다. 性이 覺과 같다고 보는 건 무리라고 나는 본다. 시공간(九世)을 우주라고 본다면 성(現存一念)은 이와는 별개의 존재라고 나는 생각한다. 49년 설법이 없다는 것은 성에 49년 설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불립문자와는 다른 뜻이다. 불립문자는 염화미소와 같은 뜻이다. 그 행위의 뜻을 이해하니까 어떤 행위만으로도 척 알고 말 안 해도 안다는 뜻이다. 설법은 말이다. 그렇다면 글은 어떠한가? 성에 도서관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사람의 침묵은 어떠한가? 부처님의 생각은 어떠한가? 다 그렇다. 성에는 만물이 다 없다(무안이비설신의는 한 예). 또한 성에는 만물이 다 있다. 그래서 성에 만물이 없어도 만물이 있는 것이며 이것이 성(우리들이다)도 즐거워하고 만물(사람의 침묵 예수의 3년 전도 부처의 49년 설법 부처의 생각 내 눈코귀 중생)도 즐거워하는 극락이다.
내 성에 중생(만물이거나 사람이다)이 있으면서 없다. 내 성에 부처설법이 없으면서 있다. 이것이 부처의 설법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부처의 설법은 성에 만물이 없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했으니 그 부처설법을 이해했다면 만물의 한 예인 부처설법(3천 년 전의 인도의 한 시기의 사건일 뿐이다. 중요하든 안 중요하든 만물의 일원일 뿐이다.)도 性(空과 하나이다) 안에 없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수보리 시대의 미래에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중생이 있지. 내가 그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내가 성 안에 없지 않느냐? 없다. 이 최태묵도 누군가의 석가부처의 나의 성 안에 없으면서 있다. 없으면서 있거나 있으면서 없으면 없어도 있고, 없으면서 없거나 있으면서 있으면 있어도 없다. 여래가 설한 법(만물의 한 가지 예일 뿐이다. 큰 의미가 없다. 착각하지 말아라.)이 있다고 하면 안 된다고 했는데 무슨 뜻일까? 바로 앞의 밑줄 친 두 저것일 것이다. 없으면 된다고 했는데 뭘까? 바로 앞의 기울인 세 저것일 것이다. 비중생 시명중생에서 비는 무이고 시명은 유이다. 설법으로 따지자면 설법이 없고 설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름이 그러하다는 것은 긍정적 의미 삶의 의미이고, 아니다 없다는 것은 부정적 의미 죽음의 의미이다.
常樂我淨은, 제법유상(있다 없다가 끊어짐: 있다 없다가 안 끊어지면 제법무상이다.) 락 제법유아(있다 없다가 끊어짐: 있다 없다가 안 끊어지면 제법무아이다.)이다. 穢와 苦는 같고 淨과 樂은 같고 예고와 정락은 다르다. 無常苦無我穢가 상락아정의 반대말이다. 이들과 성과의 연관성을 알아보자. 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예토를 벗어나는 조건이 될 수 없다. 석가모니를 포함한 우리가 가진 성을 가지고 진리를 실천해야 된다. 이는 부처님의 사성제 이론에 나와 있다. 고집멸도. 성이 제법을 포용하면 성과 함께 제법이 정토에 가는 것(출세간: 멸도: 진리)이고, 성이 제법을 용서하지 못하면 성과 함께 제법이 예토에 가는 것(불출세간, 세간: 고집: 비진리)이다. 성은 인의예지가 아니다. 인의예지는 상락아정과 같은 개념이다. 성 자체는 '中과 至善' 즉 극락이 아니다. 성으로 잘하면 극락에 가고 성으로 잘못하면 지옥에 떨어진다. 마음만 가지고(성 자체로) 다 극락(상락아정, 열반)에 간다면 스님은 왜 절에 가서 수행하는가? 사는 게 힘드니까 간 건 아닌가? 왜 힘든가 알아서 그걸 고치면 해탈이고 극락에 간다. 재명명덕은 무궁쾌락 무궁명 무궁덕 무궁명덕이다. 친민은 부처가 중생을 교화함을 뜻한다고 본다. 이는 다음의 예수 말씀과 같으며 이것이 극락이다. 주와 종이 친해지면 극락이다. 즉 주(아버지. 아 즉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아들.)가 종(너희. 제법.)이 되고(아유제법) 종이 주가 되면(제법유아) 극락이다. 親民(과 親君)이 明德이며 至善이며 思無邪이다.
요한복음
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5: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禪定이 생각이 끊어진 상태라고 하면 우리는 일상생활에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식물인간 비슷한 상태로 살아야 하는가? 나는 생과 멸을 마음에서 추방한 불생불멸의 상태가 기도요 명상이요 誦呪요 선정이요 전도요 보시요 찬송이요 교제요 제사요 헌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의 相續하는 생각에서마저 생과 멸을 추방하여 내 생각(언어문자 내지 느낌)과 함께 내가 극락에 가는 것이 선정이라고 본다. 또한 나의 생각 없음마저 그리하는 것이 그것이다. 나의 생각과 생각 없음도 중생이(요 (그 생각이나 생각없음에의) 선정마저 중생이)다. 그래서 내가 잠을 자든 오줌을 누든 직장에서 일을 하든 학교에서 강의를 듣든 집에서 설겆이를 하든 라디오를 듣든 우리는 늘 선정(불생불멸)에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제법공상이 제법실상이다. 제법비공상이 제법허상이다. 이상은 불중불화이다. 부처가 性이 제법과 공이 만남과 제법과 공이 헤어짐의 중을 잡지 않으므로 제법과 공이 “헤어진다 즉 불화한다”. 제법과 공이 만나면 상호 실(體: 供給: 和)하다 하고 제법과 공이 헤어지면 상호 허(用: 消費: 不和)하다 한다. 이상은 중화이다. 부처가 제법과 공이 만남과 제법과 공이 헤어짐의 중을 잡으므로 제법과 공이 “만난다 즉 和한다”. 중은 화와 불화의 화(만남)이고, 불중은 화와 불화의 불화(헤어짐)이다. 寂然不動은 극락을 뜻하는 것이다.
아마, 무인적막귀신세계에서 무인은 귀신에게 인(세계)이 없다 적막하다는 것이고 귀신세계는 귀신에게 인이 있다 불적막하다는 것이다. 진리에서는 이 두 가지가 합쳐서 귀신세계를 이룬다. 적연은 태극(動, 無爲 無思 無化, 凶, 憎)이다. 부동은 무극(定, 有爲 有思 有化, 吉, 愛)이다. 진리는 이 둘이 하나이므로 적연하여도 부동하다. 무위하여도 화하다. 태극은 인간동정어묵생각행위를 포함한 만물만사와 신의 상호 憎(포기, 허)이요 무극은 상호 愛(욕심, 실)인데 이 둘이 결합하면 愛憎未發이고 이 둘이 분리하면 愛憎發이다. 感而遂通天下는 신이 천하를 느끼고 천하를 이룩하고 천하와 통한다는 뜻이다. 이것이 신의 적연부동이다. 신이 천하를 이룩하지 않아도 이룩한다.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독생자)가 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되어 일체중생(시방삼세의 모든 사람을 포함한)을 제도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독생자: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가 되어 세상(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방삼세의 모든 사람을 포함한)을 구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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