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비판

일심에 대하여 논함 / 눅5:39의 뜻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다의 뜻 / 마10:34~39 해설

통밀가루 2024. 7. 23.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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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일심에 대하여 논함 / 눅5:39의 뜻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다의 뜻 / 마10:34~39 해설>

 

    이전 글의 한 링크(지산님의 스토리글)에 보면 저자는 상제님한테 돈을 저금통의 동전 하나라도 남김 없이 다 바치지 않으면 도통을 못한다는 생각을 가진 듯하다. 그렇다면 그는 이빨 하나 남김없이 신장 심지어 심장도 다 바치지는 않더라도 집의 천장 한 조각이나 칫솔 한 개나 변기의 좌석 플라스팈도 가지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비유를 잘 푸느냐 잘못 푸느냐에 광신(기독교의 순교도 광신이다)이 안 되느냐 광신이 되느냐가 달려 있다. 기독교 여러분이나 대순진리회 여러분이 일심의 뜻을 모르므로 일심에 대하여 내가 설하겠다. 겉과 속이 있다. 겉으로 아무리 칫솔을 버려봐라. 속으로 칫솔을 가지(어도 버리)면 속으로 (살아도) 죽어서 지옥 간다. 겉으로 아무리 칫솔을 가져봐라. 속으로 칫솔을 버리(어도 가지)면 속으로 (죽어도) 살아서 천당 간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눅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마 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막 2: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눅 5: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누가복음
5: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마태복음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10: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천지개벽경 중에서

 

     대한제국이 얼마 안 있어 망할 나라이긴 해도 명색이 나라이다. 그렇다면 위 천지개벽경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거나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공무원 일을 하면 도통을 못하고 천당에 못 가는가? 아니다. 이는 말씀에 대한 너무나 순진무식한 해석이다. 위 예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칫솔 하나라도 취하여 이를 닦거나 동전을 가지고 과자 한 봉지를 사먹고 부모형제처자를 愛好하면 가정폭력을 안 하면 우리는 도통을 못하고 지옥불의 영원한 유황불에서 타게 되는가? 아니다. 또, 예수와 강증산을 따르는 자로서 서울대학교에 합격하여 입학하면 하다 못해 초등학교에 의무교육에 의해 입학하면 이제 천당과 도통은 끝장인가? 아니다.

    인자가 하나님 섬김은 천하사를 함이고 재물을 사랑하지 않음이다.(진리) 인자가 재물을 섬김은 천하사를 하지 않음이고 재물을 사랑함이다.(비진리) 재물(과 완전한 거지)이란 것은 천하사의 일부이다. 대학교(와 고졸이나 중졸이나 무식상태)도 그렇고 관직(에 임용된 것과 무관직상태나 무직상태)도 그렇고 부모형제처자(와 생판 남인 선생 예수)도 그렇다. 인자가 (하나님과 함께) 이것들을 각각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것은 비진리이다. 인자가 (하나님과 함께) 이것들을 각각 사랑하지 않거나 미워하지 않는 것은 진리이다. 후자는 재물((겉) 사랑스러운 것)(과 가난((겉) 가증한 것, 인류 공공의 적))을 (다) (속) 미워해도 (다) 사랑한다. 전자는 재물(과 가난)을 (다) 사랑해도 (다) 미워한다. 전자는 인자가 천하사를 경영하고(生) 후자는 인자가 천하사를 못한다(死).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절대 겸하여질 수 없다. 生死審判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심판하는 자세가 一心이고, 生死分揀을 못하는 자세가 二心이다. 일심자는 死를 사하고 생을 취한다.(눅5:39) 이심자는 생을 捨하고 사를 취한다. 생(묵은 포도주 낡은 부대)은 우산을 안 받아도 우산을 받는다. 의뢰하지 않아도 의지한다. 사(새 포도주 새 부대)는 우산을 받아도 비를 맞는다. 의뢰해도 의지 못한다. 이심은 “의뢰심을 품어도 무의뢰심을 품는 것”을 초래한다. 상제님이 신이고 공우가 물질이라고 하자. 인자의 이심에서는 신(神明?)과 물질이 다 死한다. 다 서로 상대방을 의지치 못한다. 상대방의 우산의 그늘에 들지 못한다. 둘 다 비를 맞는다.

     (겉) 가증스런 남인 예수만 나의 (속) 원수요 내게 검(십자가)을 줄까(나를 죽일까)? 아니다. 사랑스러운 집안식구도 나의 원수요 내게 검을 준다. 그래서 세상에 (겉) 타인폭력과 (겉) 살인뿐 아니라 (겉) 가정폭력과 (겉) )가정살인사건도 있다. (세상은 다 나의 원수이기 때문에) 선생보다 식구를 사랑하기(도)(는) 불가하(고 식구보다 선생을 사랑하기도 불가하)다. (또한 다 나의 은인이기 때문에 선생보다 식구를 미워하기도 불가하고 식구보다 선생을 미워하기도 불가하다.) 이 불가함을 준수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다. 불준수한다면 그는 식구(나 남)을(를) 섬기는 자이다. 10:38, 39은 죽어도 사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요 살아도 죽는 것은 그렇지 않은데 식구든 뭐든 뭔가를 사랑하여도 뭔가를 미워하는 자는 즉 살아도 죽는 자는 예수의 가르침을 배반한 것이다란 뜻이다. 사람은 식구와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인자가 식구 하나라도 가진다면(인자가 조금이라도 산다면) 그 인자는 죽는다 그 식구를 잃는다 그리고 하나님을 못 섬긴다. 식구를 사랑치 않으면 하나님을 섬긴다. 이래서 인자가 식구를 사랑하는 것과 식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