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비판

마22:21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를 해설 / 마11:11 해설 / 마7:13, 14과 연관한 군자대로행의 뜻 / 사40:1~8 해설 / 말3:3의 공의의 뜻

통밀가루 2024. 10. 5.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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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마22:21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를 해설 / 마11:11 해설 / 마7:13, 14과 연관한 군자대로행의 뜻 / 사40:1~8 해설 / 말3:3의 공의의 뜻>

 

 

마태복음
22: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22: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22: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22: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22:19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2: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22: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22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내가 이번에 할 마22:21 해석은 정답인지 모르는 진보적이고 재미있는 해석이다. 가이사는 이스라엘을 침략한 제국주의자이다. 아래 11:12을 보라. 하나님(요한의 아버지)도 남의 것으로 자기 것을 삼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이 로마의 것이 아니지만 로마의 것이듯(이스라엘이 로마로 가는 길이 없지만 이스라엘이 로마로 가는 길이 있듯이), 세상도 하나님의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 22:21의 뜻인 것이다. ☞

2024.11.14 - [종교 비판/공산주의 연구]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에 대한 나의 最終的일 입장 / 마6:31의 염려치 말라의 뜻은 기뻐하라는 뜻이다

 

마태복음
11: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1: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1: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1: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위 11절에서 그(광야의 요한 즉 미출현 사생활 예수)보다 크니라라고 한 것은 요한이 광야(극히 작음, 미출세 사생활 예수)에 있기 때문이다. 11절에서 보듯이, 여자가 낳은 자(人子)들은 다 그리스도(天子)가 될 자격이 있다. 사람은 말이다. 요한은 대로에 있으면서도 소로(광야)에 있다. 즉 그는 군자인 동시에 범부인 것이다. 진리는 이러하므로 사람이 聖人君子가 된다. 범부여도 군자인 것이다. 비진리는 사람과 세상 간에 상호 가는 길이 넓어도 좁고, 진리는 좁아도 넓다. 현 지구인 중에 진리(君子大路行)를 행하는 그리스도는 적고, 비진리(소인소로행)를 행하는 그리스도는 많다. 크게 함은 위로이다. 작게 함은 괴롭힘이다. 11:11에 대해 더 밝혀놓은 글을 내가 썼으니 참고하라. ☞

2024.11.14 - [종교 비판/“다니엘 강해”를 비판함] - 요한계시록 13장의 여자가 낳은 아이와 남은 자손의 차이점 / 계12:11 해설 / 눅7:28; 마11:11 해설

 

마태복음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말라기
3: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3:2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3: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표백과 금연단은 비유이다. 제물은 세상 그 자체이다. 신과 세상이 상호 제물이다. 공히 피(물건 안 바침, 잿물 때 찌끼 불, 本人 예수)와 생명(물건 바침, 흰 옷 흰 옷 금은 물, 使者 요한)이다. 3절에서 공의롭다는 것은 영광스럽고 깨끗하고 선하고 두렵지 않다 공포스럽지 않다 피가 없다 쾌락이라는 뜻이다. 그 제물은 세상(이스라엘)이고 레위는 그 세상(사람 포함) 중 하나인 그리스도이다. 이는 그리스도이며 여호와의 아들이다. 세상을 아들과 아버지가 먹는다. 아들과 아버지란 제물은 세상이 먹고. 성전을 세상이라 한다면 여호와는 신이다. 여호와가 성전에 임함이 공의이고 안 임함이 공포와 피이며 공불의이다. 기독교인들이 공의를 공포나 사망심판으로 생각하는데(사랑과 공의(증오, 공포)의 하나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의는 좋은 것이고 인자하고 애정스러운 것이고 위로가 되는 것이며 불의가 수고로운 것이고 피곤한 것이고 제물을 먹지 못하는 것이다. 의가 금이라면 불의는 찌끼이고 불이다. 의리(열매)를 지킴에는 반드시 시련과 박해(낙엽, 씨)가 따라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 해도 의를 불의와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사야
40: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0: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40: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40: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40: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사람의 육신뿐 아니라 풀의 마름과 꽃 시듦에 여호와가 가는 길이 있으면 이는 요한이 외치는 것이다. 그것들에 신이 가는 길이 없으면 이는 예수가 침묵하는 것이다. 전자는 평지· 샘· 도시이고 후자는 골짜기 산 언덕· 사막· 광야이다. 풀이 마르든 싱싱하든 꽃이 지든 피든 그것에 말씀하시는 것과 그것에 침묵하시는 것이 있는데 이 둘이 합동하는 것이 진리이고, 불합동하는 것이 비진리이다. 이스라엘(남조선: 행위)이 로마(김일성의 아버지인 신 즉 북한: 명령)로 감(가이사가 유대인들의 세금을 먹음)의 여부 즉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여부는 오직 인자(인자가 예수이자 요한이면 善人子임)에 달려 있다. 아래를 보라. 인자는 신의 아들이다.

 

요한복음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14: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14: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자전거라는 동요에서 보듯이 사람이 길을 가는 게 아니라 자전거(신)가 가는 것이지만(둘 다 가지만 사람은 파리처럼 꼽사리 끼어서 차체에 붙어 갈 뿐임) 이 자전거가 가고 안 가고는 오직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그가 어린아이와 노인 즉 기아와 수치를 없이할 것인지 그 반대로 飽腹과 영광을 없이할 것이지는 그의 의지여하에 달려 있다. 아버지의 영광 즉 자전거의 영광이 탑승자의 의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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