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비판/“문광스님의 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를 비판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의 뜻 / 금강경의 “즉비······시도” 구조의 뜻 / 불립문자의 뜻 / 염화미소· 염화시중의 뜻 / 극기복례의 뜻 / 마12:31, 32; 막3:28, 29; 눅12:10; 마24:20; 마26:24; 눅21:23; 마10:28; 눅12:5의 뜻 / 증산계 종교의 배은망덕의 뜻 / 예출어정의 뜻 /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뜻 / 위천하자 불고가사의 뜻 / 치천하와 평천하의 뜻

통밀가루 2024. 8. 23. 18:06

<제목 :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의 뜻 / 금강경의 “즉비······시도” 구조의 뜻 / 불립문자의 뜻 / 염화미소· 염화시중의 뜻 / 극기복례의 뜻 / 마12:31, 32; 막3:28, 29; 눅12:10; 마24:20; 마26:24; 눅21:23; 마10:28; 눅12:5의 뜻 / 증산계 종교의 배은망덕의 뜻 / 예출어정의 뜻 /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뜻 / 위천하자 불고가사의 뜻 / 치천하와 평천하의 뜻>

 

공자와 맹자의 사상으로 본 유교와 불교의 회통 사상 [문광스님의 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18회]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은, 도를 도라고 하면 항상한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고 말하면 항상한 이름이 아니다란 뜻인데 이는 비진리는 도하여도 비도하고 명하여도 비명함을 뜻한다. 금강경에

 

 

‘즉비(卽非)’ ‘시명(是名)’

“불설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 (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 문장의 뜻은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므로 이를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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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반야바라밀 즉비반야바라밀 시명반야바라밀(佛說般若波羅蜜 卽非般若波羅蜜 是名般若波羅蜜)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부처가 말하기를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아바라밀이다란 뜻이며 이는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므로 반야바라밀이다란 뜻이다. 위의 노자의 글도 마찬가지이다. 도는 도가 아니므로 도이며 이름은 이름이 아니므로 이름이다. 여기서는 그것은 비도이어도 도이고 비명이어도 명이다. 도가 아니어도 도이고 이름이 아니어도 이름이다. 반야바라밀이 아니어도 반야바라밀이다. 여기서의 반야바라밀은 人間事의 한 예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49년을 설법하였는데 아무 것도 설한 것이 없다

 

 

금강경 7.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 얻은 것도 설한 것도 없다.

금강경 제7장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은, 반드시 세속법과 진제를 구분할 줄 알아야만 이해가능하다는 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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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은, 인간사물 지구(우주에 비하면 지구는 먼지보다 작다)사물 고대인도사물 우주사물의 한 예일 뿐인 부처님의 설법이 그것이 아니므로 그것이다란 뜻이다. 부처님이 일체중생 중 하나의 예로서 자기 설법을 들어서 진리를 설법하고 계시다. 부처의 설법도 하나의 일체중생이다. 저 부처말씀을 노자버젼으로 바꿔보자. 반야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면 이는 항상한 영원한 반야바라밀이 아니다. 노자말씀을 부처버젼으로 바꾸면, 도는 도가 아니므로 그 이름이 도이며 이름은 이름이 아니므로 그 이름이 이름이다.

     다음의 네 단어는 고등학교 국어시간 때에 무슨 시를 배우면서 배웠던 단어들이다. 不立文字는 불교교리요 불교용어일 뿐 진리(

2024.08.02 - [종교 비판] - 무아· 무상· 무념무상· 무아무상의 뜻

)는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拈華示衆(념화시중)은 연꽃을 부처가 대중에게 들어보이매 가섭이 홀로 미소하였음을 뜻하는 것인데 이는 가섭만이 그 비유의 뜻을 알고 더 이상의 설명을 필요치 않았다는 뜻이다. 拈花微笑(념화미소)도 마찬가지이다. 以心傳心도 마찬가지이다. 연꽃 비유에서 진흙은 即非(不可)를 뜻하고 연꽃은 是名(是)을 뜻한다. ☞

2024.07.12 - [종교 비판] -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뜻 / 기우멱우의 뜻

    천하무이도(天下無二道)와 성인무량심(聖人無兩心)은 맞는 말이다. 오직 진리를 성인은 좇으며 외도는 좇지 않는다. 진리는 오직 하나이다. 이를 일심이라고 하며 기독교에서는 새 부대에 (오직) 새 술을 붓는다고 표현한다.

     克己復禮는, 유교의 禮는 기독교의 愛이며 유교의 仁이며 불교의 자비이다. 이길 극 자는 상대가 나를 이긴다는 뜻으로서 내가 진다는 뜻이다. 내가 진다는 것은 상대방의 무례를 뜻하며 이에 不拘하고 (다시) 예하는 것이 사랑이다. 즉 상대방이 밉지만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다. 즉 도가 아니지만 도인 것이 도이다. 이름이 아니지만 이름인 것이 이름이다.

 

격암유록 중 격암가사 중에서

 

승기염지는 세상이 나를 이기는 것을 싫어한다는 뜻이다. 내가 세상에게 지는 게 내가 세상에게 이기는 것이 진리이다. 내가 지면 내가 상대에게 무례하지만 내가 이기면 상대에게 유례한다는 것이 진리이다. 이기는 게 아니지만 이기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예의가 아니지만 예의인 것이 예의이다. 진리는 지는 것과 이기는 것이 하나이고 무례와 예가 하나이므로 이기고 예한다. 복승 복례 부애 부활이다. 아, 내가 잘못 알았다. 부례가 아니고 복례라면 이는 다시라는 뜻이 아니라 회복이라는 뜻이다. 진리는 무례에서 례로 (영원히, 다시) 회복하므로 (영원히, 다시) 례이다.

     克己와 無己(無我)는 거의 같은 뜻이다. 무기(무아)는 세상이 나에게 지는 것이고 극기는 내가 세상에게 지는 것이다. 無我相(아상(虛相의 일종임)이 없음)의 그 아는 위의 기와 아가 아니다. 무아상의 아는 세상의 일부인 내 몸뚱어리를 뜻한다. 진리는 무아이어도 유아인 것인데 이것을 안다고 해서 무아를 증득한 것은 아니다. 마음을 진리와 비진리 가운데서 전자를 행하도록 써야 된다. 즉 자유의지가 작용해야 한다. 나는 천당과 지옥의 갈림길에 있을 뿐이지 저절로 천당에 가는 것은 아니다. 천당에 가는 것은 내 자유이다. 지옥에 가는 것도 내 자유이다. 나는 천당 지옥을 내 마음대로 간다. 絶四인 無意, 無必, 無固, 無我에서, 固는 나의 세상에 대한 집착으로서 무극(나와 세상의 교통)이며 태극(나와 세상의 각각 자기에 대한 固守)의 반대이다. 여기의 무는 반야심경의 不生不滅의 불과 같다. 생이 고와 필과 의(의지, 욕망, 탐욕, 집착)이다. 무의 무심 무집은 내 안에 세상을 비우는 것이고 무아는 세상 안에 나를 비우는 것이다. 頓悟(활연관통)와 漸修와 극기는 하나(一以貫之, 豁然貫通)이다. 극기복례는 활연관통이고 돈오이다.

     사람의 마음 안에 영원히 이 다 있다. 선이 무극이고 악이 태극인데 이 선악이 합성하면(不思善不思惡, 불선불악) 진리(천당)요 선이 되고, 불합성하면(사악사선, 선악: 불사선불사악과 사악사선은 절대 혼재되어 있을 수 없다.) 비진리(지옥)요 악이 된다. 우리는 이 진리와 비진리 즉 선악간에 늘 취사선택할 수 있다. 밑줄 친 선과 악은 조건적이고 상대적인 겉 선악이 아니고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속 선악이다. 다음의 성령훼방죄가 바로 그 절대적 악이다. 절대적 악에 두 악이 있는데 다음의 것 즉 성령훼방은 세상의 그리스도에 대한 죄악이다. 말로 인자를 거역함은 겉 악이다. 말로 인자를 찬양함은 겉 선이다. 이 두 경우에 다, 성령훼방죄 세상의 그리스도 못 박음 죄 제자의 그리스도 배신죄는 영원히 즉 절대 즉 무조건 용서받지 못한다. 절대 지옥행이다. (이 두 경우에 다, 성령찬양공은 절대 용서받는다.) 아래 26장 24절의 배신자 가룟 유다 비유(배신이란 것은 잘해줬는데 가해하는 것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背恩忘德: 요13: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을 뜻한다. 이는 비진리의 특성이다. 비진리에서는 그리스도가 12제자 전제자를 12제자 전제자가 그리스도를 서로 배신한다. 진리는 이와 반대로서 잘못해줬는데 가리하는 것 원수를 은혜로 갚는 것이다. 택 즉 선택 즉 취사선택은 그리스도가 제자를 다 버리든지 다 취하든지 중에 취사선택하는 것을 뜻한다. ☞

마 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마 24:4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막 12: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눅 12: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눅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를 보라. 겨울 안식일 아이 뱀 젖먹임도 마찬가지이다. 또, 목숨잃음얻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세상 중 사람의 겉 목숨 유무와, 세상과 그리스도 간의 속 목숨 유무는 상관이 없다. 그런데, 사람은 속 악을 행하면 (겉 선한 것이 선하다 악한 것이 악하다 선한 게 좋다 악한 것이 싫다 하지 않게 되므로) 겉악을 좋아하게 되고, 속 선을 행하면 (선한 것이 선하다 악한 것이 악하다 선한 게 좋다 악한 것이 싫다 하게 되므로) 겉 선을 좋아하게 된다.

 

마 12:31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마 12:32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막 3: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막 3: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눅 12: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마26: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마 18: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눅 6: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눅 21:23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마 24:20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마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눅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정치만 봐도 인간이 악할 수도 있고 선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을 수 있다. 김정은의 폭정과 윤석열의 선정을 보라. 兩人의 환경과 조건이 다르긴 하지만, 윤석열은 아랫 사람한테 기분 나쁘면 욕이나 찍 하지만 김정은은 죽인다.

     禮出於情은 예는 정에서 난다는 뜻이고 예가 곧 정이다란 뜻이다. 그래서 성(인의예지)과 정(희로애락)을 나누는 것은 나는 그르다고 여긴다. 이 여덟가지와 反여덟가지에서 불사선불사악 불사禮불사無情하면 예와 선이 되고, 思선사악하면 무정과 악이 되며, 이 두 선악은 절대 혼재될 수 없다. 아, 그런데 인의예지와 희로애락이 서로 완벽히 대응되지 않는다. 인의예지를 하나로 보고 선으로 본다면, 희락은 하나로서 선이고, 로와 애는 하나로서 악이다.

     내 생각에, 無敵(主無滴)은, 주가 세상에 하나도 빠짐없이 주노릇 아니 하여도 주가 세상에 하나도 빠짐없이 주노릇하는 것, 즉, 주에 세상이 하나도 없어도 주에 세상이 하나도 있는 것, 즉, 주에서 세상이 다 새어나아가도 주에서 세상이 다 안 새어나아가는 것, 즉, 주에게 하나로 세상이란 敵이 있어도 주에게 일치하게 세상이란 적이 없는 것이다. 주가 세상을 적대하지 않음이 주의 '세상에 대한' 敬이다. 이 경은 세상이 주에게 적대하지 않고 경해서 그 보답으로 생기는 것이다. 주에게 무적할 때의 세상은 주에게 경한다. 이 경 역시 주가 세상에게 적대하지 않고 경해서 그 보답으로 생기는 것이다. 無放心은 내가 무슨 뜻인지 모른다.

     유교도 심학(· 심법· 마음씀씀이· 심술)이다는 것은 스님의 좋은 말이다. 불교의 장점이 마음작용을 깊이 연구한다는 것인데 유교에도 그런 면이 있었다. 기독교와 유불선의 설법은 다 심법을 설한 것인데 인류가 그것을 잘 파악하지 못해 왔다.

     正心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神(心)이 心(앞의 심이 아니다)신가국천하에 감(정수제치평함)을 뜻한다. 제갈량의 고사와 강증산(상제님)의 부인의 비유는 비유일 따름이니 저것을 오해하고 진짜 재산을 소홀히하는 우를 대순진리회 도인들을 범하지 말아라. 예수의 다음 말씀도 심법에 대한 비유일 따름이다. 그러나 재물은 진짜이다. 그러니 그 진짜 재물(없음, 유지, 버림, 취득 등)을 마음으로 잘 다루어라. 강증산은 청렴한 제갈량의 재산마저 남김없이 버려야 함을 뜻한다. 전재산을 버려야 하며 신의 전재산은 일개인의 전재산과 절대빈곤(물 한 방울 못 먹어서 미이라가 될 정도 포함. 진리는 빈부의 상호경계를 초월하므로.)을 포함한 우주이다. 우리 심은 이 신(하나님)의 전재산을 버려야 한다(이때에 신의 전재산인 천하도 자기의 전재산인 신을 버린다). 천하에는 가사가 포함되어 있는데 우리가 가사를 고하고 나머지 천하사를 고하고 가사를 불고하고 나머지 천하사를 불고하면 우리는 천하사를 하여도 천하사를 못한다 즉 정수제치평을 하여도 정수제치평을 못한다. 그러나, 고 안 하고 고 안 하고 불고 안 하고 불고 안 하면 우리는 천하사를 안 하여도 천하사를 한다 즉 정수제치평을 안 하여도 정수제치평을 한다. 저 그러나란 말의 앞뒤의 이 두 가지는 아래 예수 말씀과 같이 절대 겸할 수 없다. 무궁쾌락 천당에는 무궁고난 지옥이 조금도 없고 지옥에는 천당이 조금도 없다. 全. 一. 大. 無窮. 弘. 우리나라가 홍익인간의 대한민국이고 무궁화동산이다. 그런데 아래 둘째 예수 말씀에서 재물이 있는 자 즉 부자는 지옥에 간다 즉 빈자가 된다는 것에서 이 재물은 실제의 재물 소유가 아니고 심법비유이다. 온 우주(실제 재물소유와 “완전한 부유부터 완전한 빈곤까지” 포함)를 가지(어도 온 우주를 못 가지)ㄴ 자는 절대 지옥에 간다.

 

 

 

유상팔백주 - 대순회보 55호 청계탑

청계탑 : 유상팔백주 유상팔백주 <교무부>   상제님께서는 신축년(1901년) 5월 중순부터 전주 모악산 대원사에 가셔서 사십구일 동안 불음불식의 공부를 하시었다. 이 공부는 도주님께서 밝혀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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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 18: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치천하와 평천하가 실제로 저 종교에서 어떤 역사로 나타났는지 나는 모르는데 일단 저것은 비유이다. 치천하와 평천하는 같은 천하사 ''함'(爲)'이다. 내가 신이라면 너희들은 각개인의 심이다. 이것이 정수제치평하는 것이 위천하사이다. 신과 심은 위천하사하면서 불위불고(顧)천하사(불치불평만물, 불치천하, 불평천하, 불수천하, 불정천하, 불제천하)하는 것이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