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비판/“문광스님의 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를 비판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의 뜻 / 무자성의 뜻

통밀가루 2024. 8. 25. 21:17

     다음은 내가 가진 불교사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문광스님의 강의 중에 무자성이란 용어가 나오는데 무자성에 대해 사전을 찾다가 범소유상······도 눈에 띄길래 같이 적어봤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凡所有相 皆是虛妄 금강경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 대저 모든 상은 허망함을 알아야 하며, 따라서 집착할 이유가 없다.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 했으며, 이것이 어느 의미에선 금강경의 해심 주제. 곧 모든 형상이 사실은 허상虛像임을 알면 곧 여래를 본다는 뜻. 깨침이라고 하여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수행이 익으면 허공을 나는 새를 보고도 깨치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중생은 본래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 것. 벽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것도 좋지만, 무엇을 알고 공부할 것. 참선이란 자신의 본래면목을 깨닫는 것.

 

凡所有相皆是虛妄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는, 무릇 상이 있는 바는 무릇 상이 없는 바이며 제상이 제비상 즉 상이 비상임을 보면 여래를 보리라는 뜻이다. 본래 원래 스스로 그냥 저절로, 무릇(영원무궁히), 물체(일체법, 법, 제법, 상, 일체중생)에는 神(心, 性, '부처(단, 심이 중생을 구제할 시에만.)')이 없고, 신에는 물체가 없고, 물체에는 신이 있고, 신에는 물체가 있다. 위 한문은 밑줄 친 글의 넷째와 둘째 항목이다. 一切衆生悉有佛性은 셋째이다. 여래를 본다는 것은 내 마음이 내 마음이 부처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느낀다 본다는 뜻이다. 아래의 즉견노사나와 뜻이 같다. 부처에게 상이 있는 것이 없는 것이므로 부처는 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며 부처에게 상이 없는 것이 있는 것이므로 부처는 상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불생불멸의 극락이다. 불교는 그렇지 못하므로, 범부에게 상이 있는 것이 있는 것이므로 상에 집착하고, 범부에게 상이 없는 것이 없는 것이므로 상을 포기한다. 이것이 생멸의 지옥이다. 위 녹색의 글을 보라. 이는 범소유상······의 자세가 아니다. 범소무상개시허망약견비상비상즉불견여래의 경지이다. 심성이 중생에게서 죽임을 당하기만 할 줄 알고 중생에게서 제도 당하기도 할 줄은 모른다.

무자성 無自性 본래 자성과 실체가 없음. 불교의 핵심 교리. 이것은 무자성無自性이 단지 아상我相과 같은 어떤 개별적인 것만이 아니라, 모든 현상에도 해당됨을 뜻함.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   (온갖 법, 곧 만물의 자성이 본래 없음을)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   (분명하고 바르게 살펴서 알라)
       여시해법성如是解法性   (이와 같이 법의 성품을 이해한다면)
       즉견노사나卽見盧舍那   (노사나노사나 부처님을 뵙게 되리라)
                                                                      -- 화엄경 --

 

     無自性은 불교에서 그것의 뜻을 뭔가 오해하고 있는 용어이다. 내가 저 화엄경 구절을 다음에 바르게 해석한다. “일체법은 스스로 성이 있는 바가 없다는 것을 훤히 깨닫아 알아라. 이와 같이 법과 성을 이해하면 곧 노사나를 보리라.”  앞의 기울어진 글은 위의 밑줄 친 글의 첫째 항목과 같다. 아상이란 것은 즉불견노사나의 일종으로서 아란 법에 (성이 있어도) 성이 없음이다. 극락은 법에 성이 (없어도) 있음이고 불허무이고 충만 원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