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비판/“문광스님의 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를 비판

동곡비서 20절 해설 / 무극진경 9장 87절 해설 / 무극진경 5장 42절 해설 / 불신간아족 해설 / 사40: 28~31 해설

통밀가루 2024. 9. 1. 05:45

<제목 : 동곡비서 20절 해설 / 무극진경 9장 87절 해설 / 무극진경 5장 42절 해설 / 불신간아족 해설 / 사40: 28~31 해설>

 

우리 마음속에 천국이 있다 | 기독교와 불교의 회통 [문광스님의 탄허사상 한국학을 말하다 26회]

 

     西方淨土는 어떤 특정지역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사후세계도 아니라고 나는 본다. 그것은 唯心淨土(사후세계의 천당 지옥의 유무를 떠나서, 무관하게. 단, 지옥이 있다 해도 기독교의 그 무시무시한 지옥은 아니니 안심하라.)와 성경의 천당 지옥과 동일한 것이다.

     모든 종교는 회통하면 정도이지만, 회통 안 하면 모든 종교는 외도입니다. 현재의 종교인들은 회통을 안 하니 외도인들이죠. 자기들끼리 이단이니 외도이니 하는 것은 외도가 자기 것은 정도라 하고 남의 것은 외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다 외도입니다.

 

춘산채지가 중에서

庸劣터라 庸劣터라

저 사람 용렬터라
孔孟子를 배운다고 
外面收拾하는 사람 
점잖은 체 해쌓더니
양반이 다 무엇인가
實地工夫 모르고서 
말로 하면 될까보냐
캄캄 심야 어둔밤에
등불 없이 가는 모양
저 혼자 잘난 듯이
聖賢君子 혼자로다 
이리하면 正道되고
저리하면 이단이지
빈중빈중 말을 하니
아니꼽고 더럽더라
코를 들고 대하려니
냄새나서 못 대할러라

 

     태극(음양이 안 끊어짐. 음양구분. 음양불일치.)과 무극(음양이 끊어짐. 음양불구분. 음양일치.)이 끊어진 것(무극태극선악시비가 끊어짐. 무극태극불구분. 무극태극일치.)이 진리이다.

     무량수의 수가 속 壽라면 이는 속 福과 일치하는 개념이다. 즉 말만 다르지 한 물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래진경 말씀의 수는 겉 수이고 복은 속 복이다. 아래의 산상수훈에도 나오지만 속 복을 챙기면 겉 복 (중의 하나인 수명)은 따라오는 경향이 있다. 예수나 부처 같은 성인들은 속을 중시한다. 부처가 말한 急先務도 속의 것이다. 또, 우리 육체의 수명은 한정적이라 “'요한 계시록 21, 22장과 이사야 65장'의 신천지” 즉 '다니엘서의 돌나라'에 들어가서 수명이 아무리 길어도 오만 년(증산계 종교의 주장)이 되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진리 비진리의 수명 즉 생명 즉 복록과 사망 즉 화액은 영원하다. 영혼은 육체가 죽은 후에 빠져나와 생존한다.

마태복음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불교에서 사람이 부활하는 것을 중시 안 하는 것은 잘하는 일이다. 기독교가 본 받아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은 실존 여부와 상관없이 진리에 대한 비유로서 알면 좋다. 부처님은 不信看我足(못 믿겠으면 내 발을 보아라)이라 했는데 이 역사적 사실(사실이라고 치자)도 진리에 대한 비유로 보면 좋다.

 

복중팔십년은 노자이다. 철환천하는 공자이다.

 

 

불신간아족지각(不信看我足知覺) - 대순회보 136호 대순광장

불신간아족지각(不信看我足知覺) 연구위원 김광년  상제께서 공사를 행하실 때 대체로 글을 쓰셨다가 불사르시거나 혹은 종도들에게 외워 두도록 하셨도다. ... 道傳於夜天開於子 轍環天下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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趺는 발등· 발뒤꿈치라는 뜻이다.

    

마태복음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탄허스님 실력이 대단하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진리에서 부처(者, 心)와 중생이 상호 죽어도(번뇌해도) 산다(해탈한다)는 것과 말만 다르지 같은 현상이다. 虛心者福矣나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같다. 다 좋은 표현이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에게 마음이 가난함은 좀 수수께끼 같고 허심은 단박에 느낌이 온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표현은 다양한 것이 좋다. 마치 십간과 십이지지가 머리카락과 빗과 베와 바디처럼 교차하듯이(십간과 십이지지가 저와 비슷하게 교차하나?) 진리에서 음과 양을 십자라고 본다면 그들은 서로 교차한다. 즉 둘이면서 하나다라는 것이다. 즉 음양이 둘인 것과 음양이 하나인 것이 하나라는 것이다. 빔과 불통함과 판밖은 음양분리이고 참과 통함과 판안은 음양통합이다. 음에 양이 비고 양에 음이 비면 음에 양이 안 통하고 양에 음이 안 통하며 음 판 밖에 양이 나고 양 판 밖에 음이 나는 것이다. 판안 공부는 마음이 부유한 자는 복이 없나니 지옥이 그의 것임이요이며 판밖 공부는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임이요이다. 판안 공부는 판안과 판밖에 둘이라 판안이어도 판밖이며, 판밖 공부는 판안과 판밖에 하나이라 판밖이어도 판안이다. 이십사절후문(동지 소한 대한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 입하 소만 망종 하지 소서 대서 입추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 입동 소설 대설: 내가 청년시절 대순진리회 다닐 때에 소정의 주문에 이 주문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지금도 외우고(독송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암기하고 있다이다) 있다.)은 추운 계절 즉 판밖과 따뜻한 계절 즉 판안 혹은 결실의 계절 즉 판안과 비결실의 계절 즉 판밖으로 보는 것이다. 철을 아는 것은 판밖과 판안을 다 알아 판밖공부를 하는 것을 말하며, 철을 모르는 것은 판밖과 판안을 어느 한쪽만 알아 판안공부를 하는 것을 말한다. 소년(판밖)이라도 지각이 있는(판안) 자는 판밖공부를 하는 자이고, 노인(판안)이라도 지각이 없는(판밖) 자는 판안공부를 하는 자이다. 이는 그 아래의 이사야 구절과 동일한 비유이다.

     “천간과 지지” 즉 절후는 중생 즉 천하를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신을 음이라 하면 천하는 양이다. 음과 양이 교차하지 않아 종횡 一字이되 교차하는 十字가 진리에 비유된다. 진리에서는 신이 시간(철)을 모르고 시간(철)이 신을 몰라도 신이 시간을 알고 시간이 신을 아나, 비진리에서는 신이 시간을 알고 시간이 신을 알아도 신이 시간을 모르고 시간이 신을 모른다.

     마음이 통통 빈 것에서 마음이 通通(도통)하는 것과 마음이 텅텅 빈(도색하는) 것은 서로 반대이다. 이 반대의 것이 합쳐진 것이 진리이고 천당(도통진경)이고, 안 합쳐진 것이 비진리이고 지옥(도불통가경)이다.

 

동곡비서 20절
최덕겸(崔德兼)이 여쭈어 가로대 [천하사는 어떻게 되오리까?] 선생 가라사대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를 쓰시며 가라사대 [이러하니라]. 자현이 가로대 [알 수 없습니다]. 선생이 다시 그 위에다가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를 쓰시고 차경석에게 일러 가라사대 [네가 알겠느냐?] 경석이 대답하기를 [알 수 없습니다]. 선생 가라사대 [청죽같이 속이 통통 비었는 도통자라야 안단 말이다]. 또 가라사대 [베짜는 바디와 머리빗는 빗과 같으니 알것느냐?] [알 수 없습니다]. 선생 가라사대 [판안 공부로는 알수 없을 것이요, 판밖 공부라야 알게 되느니라] 하시니라.
또 가라사대 [이십사 절후문이 좋은 글인데 세상사람이 모르느니라. 속담에 절후를 철이라 하고, 어린 아해의 잘못하는 것을 철부지라 하고, 비록 소년이라도 지각이 있는 자는 철을 안다하고, 비록 노인이라도 지각이 없는 자는 철부지라 하느니라].

 

 

 

이사야
40: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0: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40: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40: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40: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40: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40: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40: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40:12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40:13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40:14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40: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40:16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40:17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40:18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40:19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40:20 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40:21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40:22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 같이 치셨고  
40:23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40:24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  
40:25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40: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40: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40: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40: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40: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29절은 판안과 판밖이 같음을 나타낸다. 그런 판국에는 31절이 나타나고 29절의 반대의 판국에는 30절이 나타난다. 진리는 28절과 31절의 합체이다. 진리는 신(부처는 이와 연결)과 중생 상호 힘남이다. 31절의 자가 중생이 아니고 부처일 수도 있다. 진리에서는 삼자가 다 힘이 난다.
     성령이 중생에 충만함이 성령이 중생에 텅텅 빔과 함께 하면, (성령허무하여도) 성령충만함이 이루어진다. 성령이 중생에 허무함이 성령이 중생에 가득 참과 함께 하지 않으면, (성령충만하여도) 성령허무함이 이루어진다.

     물학과 심학의 관계가 실학과 허학의 관계와 같지 않다. 물학에도 실학(과학. 實事求是.)과 허학(비과학)이 있듯이 심학에도 실학(천당)과 허학(지옥)이 있다. 그런데 스님의 뜻이 나의 이 뜻과 상충되지 않는 듯하다. 스님 말씀이 진실로 옳으니, 마음이 텅 비어 허무하면 아무리 우리가 일본과 북한과 미국보다 잘 살아도 우리가 지옥에 있으면 영적으로 (행복해도) 불행하다. 즉 (마음이 꽉 차도) 마음이 텅텅 빈다. (마음이 비어도) 마음이 꽉 차야 행복하다. 심령이 가난함의 심령과 허심의 심은 같다. 심이 령이다. 불교에서 심령이란 단어를 전혀 안 쓰니까 스님이 불친근감을 느끼는 모양인데 이는 무식의 소치이다. 단어가 다르다 해서 회통을 못하면 안 된다. 심령이란 단어는 불교에는 없는 기독교의 장점이므로 물리칠 이유가 없다.

     산상수훈에서 예수가 모세의 율법보다 우수한 율법을 구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세의 율법을 비유적으로 해석한다든지 해서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않고 완전케 한다는 개념을 예수는 쓰고 있다. 산상수훈의 이 부분은 예수의 비유솜씨가 빛을 발하는, 뜻이 심오하며, 위대한 부분이다. 아더 핑크의 글이 옳다. 기독교인들의 소위 성령충만은 심령이 가난하여도 심령이 충만한 천국이 아니고 심령이 부요하여도 심령이 텅텅 빔의 지옥이다. 그들은 산상수훈의 심령의 가난함을 추구하여야만 그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성령과 일체이며 우리는 중생에게 성령을 充塡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단순히 말해서, 우리가 성령이고 중생은 상대방이다. 성령충만은 중생의 입장에서 행복해지는 것이고 우리 입장에서는 중생충만이 우리의 행복이고 식사이고 부유이고 “허의 반대인 충만”이다. 이 부분이 헷갈리면 지옥에 떨어질 것이 분명해 보인다. 즉 우리(영혼)가 중생(우리 몸 포함)인 걸로 착각하면 말이다.

     동자(불교 표현) 즉 소자(성경 표현)는 빈 것과 같은 개념이다. 마음이 빈 것은 마음에서 중생이 빠져나간 것이다. 마음에 중생이 없어서 마음이 비어 있는 것이다. 이때의 마음은 어린아이가 된다. 탄허 스님 실력이 무섭다. 그 시절에 이것까지 알고 계셨다니. 현재의 기독교인들이 그분한테 지지 않게 분발해야 된다. 불교인들도. 비유상, 어린아이나 부녀자가 천진하다는 것에는 죄로 인해 벌을 받아서 어리고 어려서 모르고(피해) 악하고(가해) 거짓된다는 뜻이 있다. 진리 비진리 비유에서 어린아이는 좋은 뜻이 아니다. 聖의 반대의 개념이 어린아이이다. 네가 돌이켜 동자가 안 되면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은 도색한 자가 아니면 천국에 못 간다이지 도통한 자가 아니면 천국에 못 간다가 아니다. 이게 탄허스님의 한계이다. 작고하셨지만 더 분발하셔야겠다. 불교도와 기독교도는 자기가 부처가 되고 그리스도가 되어야 하는데 자기가 양과 중생인 줄로 알고 타 그리스도 동료 부처 동료에게서 떨어지는 구원을 바라고 있으니 정말로 한심하다. 자기는 양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하는 목자인데 자기가 양인 줄로 잘못 알고 타 목자로부터 구원을 바라고 있다. 타 목자의 구원은 타 목자의 마음속에 있는 것으로서 타인은 절대 모르는 세계이다. 타인 목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세계이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중생(우리는 중생이 아니다. 우리의 몸이 중생이고 영혼은 즉 우리는 목자이다. 우리는 영혼이고 몸은 우리의 옷이나 집이다. 마징가 제트는 내가 아니고 로보트이고 그 안에 탄 조종사가 나이다. 내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라.)이 천국에 간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기독교인들이 오해하는 고로 타 종교를 배척하고 타 종교와 기독교와의 회통을 가로막고 있으며 이는 기독교인 자신의 천국행을 스스로 막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에 가는 것과 나를 통해서만 세상이 천국에 간다는 것은 완전히 서로 뜻이 통하는 모순 없는 말이다. 者는 나이고 세상과 나는 동시에 천국에 간다. 나는 세상을 통해서만 세상은 나를 통해서만 상호 천국에 가고, 나는 세상을 안 통해서만 세상은 나를 안 통해서만 상호 지옥에 간다.

     노자가 어린아이에 대한 설한 것은 진리는 어린아이(음양교합을 안 한다 힘줄이 부드럽다 하루 종일 운다: 무심)이어도 어른이다(성기가 빳빳하다 주먹을 꼭 쥔다 목이 안 쉰다: 유심)는 뜻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라는 것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는 것은, 좁은 문(멸망: 못 들어감)으로 들어가도 넓은 문(생명: 들어감)으로 들어가는 자는 적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는 것이데, 이는 진리를 행하는 자는 현 지구상에 적고, 비진리를 행하는 자는 현 지구상에 많다는 현재로부터 2천 년 전의 예언이다. 위의 “들어가기를 구하여도”를 좁은 문에 들어가기를 구하여도로 해석해도 무난하다. 종일 지껄이거나 생각해도 그것이 없다는 것의 말과 생각은 중생이고 마음이란 것은 부처이다. 허심과 무심은 부처 즉 심에 저 말과 思가 없다는 뜻이다. 부처가 그것들을 잃고 어린아이가 되고 그 말과 생각을 향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 그것들을 얻고 어른이 되고 말과 생각을 향한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진리이고 극락이다. 탄허스님이 이 사실에 접근은 꽤 했는데 뭔가를 잘못 알고 계셨을 것이다. 좁은 문은 신과 물질의 상호 고난 즉 어린아이상태인 것이 맞다. 단, 좁은 문은 그리스도나 중생의 속고난이고 십자가 고난은 그 속고난이 아니므로 좁은 문을 십자가 고난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겉핥기라고 한 탄허스님의 말은 진실에 맞다. 십자가 고난은 비유로서는 속고난과 좁은 문이라 할 수 있으나, 실제로서는 신과 물질간의 속고난(좁은 문)과 속쾌락(넓은 문)의 합치 즉 진리와 불합치 즉 비진리에서의 물질의 일부분일 뿐이다. 샤카무니가 아무리 고행을 하여 뼈만 남는다고 한들 깨닫지 못하여 여전히 범부이면 넓은 길로 가도 좁은 문으로 가게 되고, 샤카무니가 음식을 적절히 먹고 쾌락을 누린다 하여도 그이가 깨닫아 부처가 되면 좁은 길로 가도 넓은 문으로 가게 된다. 이 대목의 탄허 문광 스님 말씀은 기독교인들이 그 옳음을 인정해야 한다.

     어린아이 = 불신 = 좁은 문 = (속) 무소득 유소실.  어른 = 신 = 넓은 문 = 유소득 무소실. 유교의 君子大道行이란 것은 어른(두 어른 즉 부처어른 중생어른 중에서도 부처(와 그리스도와 군자와 성인)(이) 어른임)은 큰 길로 다닌다는 뜻이다. 바로 전 문장의 등가관계와 같다. 진리는 불신이 신이므로 불신하여도 신한다. 여기서의 신을 正信이라고 하자. 비진리는 불신이 신이 아니므로 신하여도 불신한다. 여기서의 신을 邪信이라고 하자.

     결론부터 쓰자면, 기독교와 도교와 불교와 유교는 완전히 같은 뜻이다. 좌망이니 물아양망이니 하는 것은 반드시 기독교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그 사실을 아직 사람들이 모르고 있을 뿐이다. 단순히 단어가 다르다고 해서 개념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치하다. 물아간의 믿음은 물아 즉 피아(아는 심이고 목자이다. 피는 양떼이다.)에 대한 마음의 잡음(take)이 끊어진 것 즉 마음이 그들을 놓친 것이다. 이 상태가 물이 아를 신하고 아가 물을 신하는 극락이며 도통이며 진경이며 대동세계이며 천국이다. 진리는 물아간의 믿음 즉 물아양망과 물아간의 불신 즉 물아양불망이 하나이라서 마음이 이 둘을 다 놓쳐서 물아양불망이 되어도 물아양망이 된 상태를 뜻한다. 불교교리도 장단점이 있고 기독교교리도 正誤点이 있다. 서로 개선하면 탄허스님 말씀처럼 현 종교는 무너지고 종교가 통일되어 초종교가 탄생한다. 이는 모든 종교가 마찬가지이다. 자각의 종교와 종교의 자각 말씀은 옳고 불교의 장점을 잘 살린 말씀이다. 離苦得樂 발원은 옳다. 이는 아래의 말씀과 마찬가지의 뜻이다. 하나님이 지옥을 만든 것은 세상을 천국으로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 지옥은 텅텅 비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탄허스님의 초종교 초종파에 대한 예언 내지 예측은 옳다. 성인이 두 마음이 없다는 것은 천당(성인)이 천당이고 지옥(범부)이 지옥이라 천당이 지옥이 아니고 지옥이 천당이 아니다는 것이다. 즉 일심이지 이심이 아니다는 것이다. 이에 초종교와 각양각색 기존종교를 대입하면 어떻게 될까? 못하겠다. 어려운데.

     다음 시간은 탄허스님의 미래학에 대한 강의라 하는데 내가 할 얘기가 별로 있지 않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