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일용할 양식의 뜻 / 희로애락지미발위지중 발이개중절위지화의 뜻>
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發而皆中節謂之和를 내가 풀기를, 희로애락을 발하지 않는 것이 중이다 발하되 다 중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한다이다. 중과 화는 같은 뜻이다. 발함은 겉으로 발함이고, 발하지 않음은 속으로 발하지 않음이다. 속으로 발하면 즉 속으로 개불중절하면 이는 겉으로 발하든 겉으로 불발하든 속으로 非中和이다. 속으로 미발하면 즉 속으로 개중절하면, 겉으로 발하든 겉으로 불발하든 이는 속으로 중화이다. 중은 먹음과 굶음의 합일이고, 和는 먹음이거나 “먹음과 굶음의 합일”이다. 隨時處中은, 언제나 늘 영원히 일상생활에 日日平均二十四時에 중에 처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심적(돈이 많아도 마음이 행복하지만 그런 류의 행복이 아니다) 행복(구원받음)의 비결이 바로 중이고 이는 유교 안에 있었다. 중은 수시로 언제나 영원히 필요하다.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은 日用事物行事이다. 우리는 사물이 아니고 영혼이며 사물은 우리의 양식이며 보화이며 전소유물 즉 전재산이다. 빵이 다섯 개가 있을 때에, 배 고플 때 다 먹든지 배 아니 고플 때에 가운데 세 개만 먹든지 간에 늘 처중(주가 전소유물(종)을 먹지도 아니하고 아니 먹지도 아니함. 종이 전소유물(주)을 먹지도 아니하고 아니 먹지도 아니함)하는 것(주가 저 두 종들을 다 일용하고 먹는 것)이 時中之道이다. 과는 먹음이고 불급은 아니 먹음인데 중은 과도 아니하고 불급도 아니한다. 즉 먹지도 아니하고 굶지도 아니한다. 먹으면 넘치는 것이고, 굶으면 모자라는 것 못 미치는 것이다. 이는 중용이 아니며 진리(행복, 먹음, 배부름)가 아니다. 偏과 倚(의: 의지하다, 치우치다)는 먹는 것(依, 倚)과 굶는 것(不依, 不倚)을 하는 것을 뜻한다. 불편불의는 먹지(依) 않고 안 먹지(不依) 않는 것이다. 不偏不倚無過不及之名이 중이다. 權道(저울도)이다. 저울대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처럼 진리도 사랑(구원받음)과 미움(버림받음) 즉 애와 증 가운데에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다. 딱 미워한 만큼 사랑하고, 사랑한 만큼 미워한다.
내가 얼핏 볼 때에 원효스님의 대승기신론은 엉터리 학문이다. 썩은 유학자들(腐儒)과 같은. 中은 純善이다. 조금도 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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