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비판

반야심경의 오온과 육근과 육식과 육경에 대하여 논함 / 마5:27~30과 마18:1~14의 뜻

통밀가루 2024. 7. 1.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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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5: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5: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태복음
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18: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18: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8: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18: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18: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18: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8: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8:11 (없음)
18:12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8: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8:14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彌勒菩薩 따위의 보살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여러분의 몸에 장착되어 있는 여러분의 영혼이다. 그것(空 즉 神의 아들(我))이 당신들의 몸을 관자재(대상이 '있지 않아도'(저절로) 있다. 대상을 '보지 못해도'(저절로) 본다.)한다. 내 몸 또한 일체중생 즉 萬有의 하나인 것이다. 오온은 色受想行識이다. 六境은 色聲香味觸法이다. 六根은 眼耳鼻舌身意이다. 六識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이 육경을 감각하는 작용을 말한다. 불교사전에 따르면 오온의 식이 육식이라고 한다. 오온의 색은 굉장히 큰 개념이다. 육신을 포함한 물질세계이다. 이래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라고 한 모양이다. 受 즉 受蘊은 三受가 있는데 이는 세 가지 감각으로서, 苦受 즉 외계의 접촉에 의하여 몸과 마음에 받는 괴로운 감각과 樂受 즉 바깥 경계와의 접촉에 의하여 즐거움을 느끼는 감각과 捨受 즉 고수와 낙수에 속하지 않는 감각, 곧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다. 想蘊은 지각 즉 사물을 알아차리는 작용이고, 行蘊은 선악에 관한 일체의 의지적 작용이고, 識蘊은 육식이다.

     보살은 이 모두를 안 보아도 봐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우크라이나 여인이나 독일이나 한국여인이나 간에 본다면 또 이렇게 안아 본다면 나의 눈과 손과 여인과 나의 시각과 나의 촉각을 내가 다 “봐야(觀自在菩薩 觀世音菩薩) (世音을) 듣어야 인식해야 시인해야 지각해야 믿어야 이해해야 용서해야 사랑해야 의지해야”(어떤 한 작용을 전달 표현키 위해 여러 말로 표현) 하는 것이다. 여기서 빠진 것은 태양의 빛이다. 빛이 있어야 그 반사광으로 여자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내 눈과 내 視覺(일종의 전기작용이라고 하는데)과 여자 외에 빛마저 봐야 관자재해야 된다. 만일 그것들(중생)이 (보살에게) 없다면 보이지 않는다면 이는 그들이 보살에게 범죄한 것(여자중생이 남자보살에게 어떤 원리로 범죄하여 보살로 하여금 여자에게 음욕을 가지게 하는지 나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남자보살이 여자에게 음욕을 느끼는 것은 그남이 그녀에게 졌고 그녀로 말미암아 실족하고 그녀에게서 범죄를 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탕한 남자는 여자에게 진 불쌍한 남자인 것이다.)이다. 위 18:9의 보살의 두 손이나 두 발이나 두 눈이나 장애로 인한 한 손이나 한 발이나 한 눈이 보살로 하여금 범죄케 함은 무엇인가? 그것들이 보살로 하여금 “보살이 보살의 손과 발과 눈으로 하여금 보살을 보지 못하게 하”게 함이다. 범죄자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실족케 한다는 것은 범죄자가 상대방에게 범죄함을 말한다. 18:5의 누구든지는 중생이고 나는 예수(어린 아이)이고 어린 아이는 예수의 동료 그리스도 즉 우리들이다. 예수의 이름 따위는 필요없다. 우리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믿는다고 하면 이는 뉴튼의 이름으로 우리가 그것을 믿거나 고등학교 물리학 교사의 이름으로 그것을 믿는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러니 별 의미 없는 표현이다. 그것은 누구의 것이 아니라 공용의 법칙이니까. 영접은 구원이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그 아이가 어른이 된다. 영접과 믿음은 같은 것이다. 중생이 예수를 영접하는 것은 중생이 예수를 믿는 것이다. 보살과 중생의 상호 범죄라는 것은 상호 영접을 안 하는 것이고 내쫓는 것이고 내쫓긴 자는 실족한다 구덩이에 빠진다. 모두 어떤 한 심리현상을 다양한 말로 표현한 것들이다.

     5절에서 중생이 독생자(〃) 우리와 독생자(이 우주 간에 하나 밖에 없음) 예수를 영접하는 것과 6절에서 중생이 우리와 예수를 믿는 것은 같은 행위이다. 예수도 소자이고 중생도 소자이다. 실족은 소자 됨이다. 지옥 즉 비진리는 보살과 중생이 상호 소자가 소자이고(실족하고) 대인이 대인이다(길을 잘 다닌다). 천당 즉 진리는 소자가 대인이고(평탄한 길을 잘 다니고) 대인이 소자이다(구덩이에 빠져 실족한다) 비진리는 의인이 구원받고 죄인이 구원받지 못하나 진리는 의인이 구원받지 못하고(구덩이에 빠뜨려지고) 죄인(구덩이에 빠진 자)이 구원받는다. 당연하면서도 기적적인(죄인이 표창장을 받고 의인이 수치를 당하니 이상한, 상궤에서 벗어난) 일이 진리이다. 6절의 前半部는 예수나 우리가 중생을 영접하지 않아서 예수의 중생이나 우리의 중생(같은 중생에게 예수와 우리는 공동 一夫一妻 그리스도질 한다)이 실족(춥고 어두운 바깥에서 이를 갈며 울음)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면 진리와 비진리의 상호성 보은성 보복성 원리에 따라서 예수와 우리도 추방되고 실족하게 된다. 바다에 안 빠지고 이를 갈을 바에야 바다에 빠지고 이를 안 가는 게 낫다는 것이 6절 後半部의 뜻이다.

     18:7 전반부는 그리스도와 보살이 세상을 실족하게 함으로써 세상에 화가 있다는 뜻이다. 후반부는 지옥에서의 그리스도의 보살에 대한 범죄는 반드시 영원히 존재하나 그 범죄자에게는 화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그리스도와 보살을 실족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와 보살에게 화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비진리의 상호성 보복성을 말한다. 범죄자는 벌을 받는다. 진리는 범죄자는 벌을 받는 것(보복성)과 공로자가 상을 받는 것(보은성)이 합하여(죄인이 상을 받고 의인이 벌을 받아서) 범죄자가 벌을 받아도(보복해도) 공로자가 상을 받는다(보은한다)(죄인이어도 의인이다, 벌 받아도 상 받는다, 죄인이어도 상 받는다, 벌 받아도 의인이다). 비진리는 범죄자가 벌을 받는 것(보복성)과 공로자가 상을 받는 것(보은성)이 안 합하여(죄인이 벌을 받고 의인이 상을 받아서) 공로자가 상을 받아도 범죄자가 벌을 받는다(보복한다)(의인이어도 죄인이다, 상 받아도 벌 받는다, 의인이어도 벌 받는다, 상 받아도 죄인이다).

     10절은 보살들아 이 소자(중생) 중 하나도 버리지 말고 구원하라는 뜻이다. 보살의 두 눈이 있다는 중생과 보살의 한 눈이 빼어졌다는 중생이 있으면 우리는 보통 전자만 구원하게(존귀히 여기게) 되지마는 그래서는 절대 안 된다. 이는 저 첫째 중생을 구원하고 버리고 둘째 중생을 버리고 구원하는 것이므로 두 중생을 구원해도 버리는 것이다. 하나도 구원하지 않고 버리는 것이다. 저 중생들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구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 것도 구원하지 않고 아무 것도 버리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두 중생을 버려도 구원하는 것이다.

     12절~14절은 진리에서는, 신과 사람이 이 작은(미움 받는) 자 장애와 온전 중에 하나도 잃지 않아서, 사랑 받는 온전을 미워하고 미움 받는 장애를 사랑하여,장애와 온전을 다 미워해도(잃어도) 다 사랑한다(잃지 않는다, 업신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단, 미움 받는 장애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 받는 장애를 미워하는 것과 같고, 사랑 받는 온전을 미워하는 것은 미움 받는 온전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여자와 '여자를 보는 내 눈'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一卽多多卽一이라서 그런가?